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보의 난 (문단 편집) == 배경 == 당나라는 건국 이래 앙쯔강 하류 일대(지금의 [[안후이성]], [[장쑤성]], [[저장성]] 일대)의 비옥한 곡창 지대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물자를 재정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래 남방의 여러 번진에서 반란이 빗발쳤고 또 장안ㆍ낙양과의 거리도 제법 있다보니, 당나라의 재정기반이었던 이 일대의 지배권도 위태로워졌다. 이에 [[당헌종]]은 정부에 반항하는 번진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중앙의 고관을 절도사로 파견하여 지배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절도사들은 임기가 짧았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를 승진을 위한 단계로 여기고 부임지에서의 통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로지 감군으로 파견된 환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막대한 재물을 '진봉'이라는 명목으로 중앙에 바쳤다. 진봉(進奉)은 번진에서 경비로 쓰고 남은 잉여 재원을 중앙에 반환한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병사에 대한 급여를 유용하고, 현지 백성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매겨 착취하는 등 온갖 수탈을 자행했다. 진봉은 강회(江淮. 현재 양쯔강 중하류의 완후이성의 화이허강 일대)에서 특히 두드러졌고, 이 때문에 이 지역의 백성과 병사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그러나 중앙은 이를 단속하기는 커녕 오히려 많이 보낸 절도사의 근무 평가를 잘 쳐주는 등 착취를 독려하는 행태를 보였다. 결국 강회 일대의 병사들은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855년 절동에서 반란이 처음 벌어졌고, 858년 선주 도장 강전태(康全泰)가 난을 일으켜 관찰사 정훈을 내쫓았다가 회남 절도사 최현에게 패해 400명과 함께 목이 베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남과 호남, 강서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절도사를 구금하거나 추방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이렇듯 강남 일대가 병사들의 거듭된 반란으로 혼란에 휩싸이자,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일반 백성도 들고 일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